진주시 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버스 노선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251번이나 151번이 집 근처를 지난다는 것은 알지만, 300번대로 가면 노선이 헷갈려서 알아서 타기가 어렵다. 하지만 버스가 오 분 꼴로 한 대 오다 보니, 아는 버스만 탈 수도 없는 노릇. 고개를 쭉 빼고 있는 나를, 버스정류장 좌석에 앉은 할머니가 위아래로 훑어봤다.

 

 다음 날 만난 두 친구는 모두 시력이 좋지 않았(었)던 적이 있었다. 한 명은 고등학생때부터 지금까지 안경을 쓰고, 한 명은 중학생 때부터 안경을 쓰다가 성인이 된 이후 라식 수술을 했다. 우리는 새로 생긴, 한산한 수제버거집 구석에 앉아서 시력 이야기를 했다. 일 미터쯤 떨어진 메뉴판에, 적어도 48pt 이상으로 적혀있었을 문구를 째려보는 나를 보면서, 맞은편에 있던 라식 수술을 한 친구는 이건 좀 심한데, 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내심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수술이라니,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나를 슬프게 만들던 내 호두모양 턱도 보톡스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결국 인정했던 (love yourself!) 나에게, 그건 너무 무서웠다.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어보이자 옆자리에 앉은 안경을 쓴 친구는, 도수가 들어간 콘텍트렌즈를 추천해주었다.

 

 콘텍트렌즈는 의외로 빠르게 바로 다음 날 사게 되었는데, 동생과 같이 들른 진주문고의 옆옆 건물이 이노티안경원이었기 때문이다. 동생도 낮은 시력으로 몇 년간 안경을 썼다가, 안경을 부쉈다가, 안경을 새로 샀다가, 잃어버렸다가, 결국 스마일 라식까지 도달했던 경험이 있는 근시 선배였다. 진주문고와 안경원이 같이 있는 블록의 맞은편에서 건너는 신호를 기다리면서, 나 시력이 0.3인 것 같다고 말을 하자 동생은 책 사기 전에 콘텍트렌즈를 사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길을 건너자마자 이노티안경원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내부도 꽤 컸다. 원목 나무 패널로 촘촘히 벽을 감싼 건물은 마치 낚시 용품을 파는 오두막 같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곳은 험난한 진주시 평거동 상권에서 최소 십 년을 버틴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 십 년동안 나는 안경닦이를 받으러 간다는 친구의 뒤를 따라 딱 한 번 들어가봤을 뿐이라서, 여기에 손님으로 왔다는 느낌이 신기했다. 막 오십 대쯤 되었을 덩치 큰 남자가, 닫히는 자동문 앞으로 들어서는 둘에게 전화번호 뒷자리를 물어봤다. "저 처음 옵니다.", 남자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작게 아 네, 답했다. 잠깐 정적이 생기자 나는 뒷자리를 말해주었고 남자는 고개를 들어 "처음 오면 말씀하실 필요는 없지요" 라며 웃었다. 옆에 선 동생의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나는 만나지 않은 지 삼 년이 더 지난 작은아버지를 연상하며, 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테이블 앞에 앉은 동생을 두고, 그 남자를 따라 시력측정실로 들어갔다. "앉으시죠. 지붕 안 무너집니다."/"에, 옙"/"아, 요즘 안 먹히는 유머인갑네, 옛날에는요, 누가 서 있으면 앉으라고, 지붕 안 무너진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재미없지요?"/"아하하" (나는 뒤통수에 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을 했다.) 남자는 의자를 당겨라, 턱과 이마를 앞에 있는 받침대에 대라, 등등을 안내하면서, 합쇼체로 대답하는 나에게 혹시 군인이냐고 물어봤다. 자신은 군생활을 꽤 오래 하다가 나왔는데, 군인 말투하고 다를 바가 없어서 신기하다고. 나는 그의 이력을 듣고 다소간 터프한 말투를 납득했다.

 

 시력 측정 결과, 양쪽 눈 모두 0.1이었다. 일상생활을 불편함 없이 영위하기 위한 최소의 시력은 0.7. 지금 내 눈이 대충 일곱 배는 더 좋아져야 육안으로 보라고 써둔 안내문들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남자는 만화 속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쓸법한 옹졸한 안경알의 안경을 내밀고, 이걸 쓰고 몇 걸음 걸어가보라고 말했다. 나는 시력측정실 앞에서 안경을 쓰자마자 곳곳에 적혀있는 한글과 알파벳이 각막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이 이렇게 정보값이 많은 곳이라고? 앞으로, 옆으로 걸으며 쇼윈도 바깥에 비치는, 멀찍이 걷는 사람들의 다리가 세밀하게 교차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나는 안경을 써야 하는구나. 앞서 건네받은 안경을 벗은 뒤, 나는 안경이 보통 얼마 하냐고 물어봤다. (물건마다 다르겠지만) 이만 원 안쪽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에, 안경도 같이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나를 할인가에 판매하는 안경테 진열대로 데려갔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만 원이고 이만 원인지 알려주었다. 사실 뿔테 안경이 만 원이고 가느다란 테 안경이 이만 원인 듯 싶었다. 동생은 뿔테 안경을 아무거나 집어쓴 날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좀더 세련된 테를 골라주었다. 안경알과 같이 구입하면 삼만 원, 연말 할인이 있었는지 이만 원에 안경을 얻었고, 콘텍트렌즈와 같이 사서 진주문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 구매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시각은 대략 다섯 시 반. 돌아가기 전 탑마트에 들러 와인과 야키소바, 구워먹는 치즈를 사왔다. 나름대로 우리끼리 송년회를 해 볼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외출 알레르기가 있는 동생은 귀가 직후, 입을 벌리고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배가 고팠던 나는 식사 준비 역할 분담을 포기하고, 설거지는 네가 하라며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집 안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착용해보았다.

 

 아, 세상에. 바닥 무늬는 생각보다 더 기괴하고 복잡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꽤 많이 떨어져 있었다. 식탁을 덮은 레이스 식탁보는 뱀의 가죽처럼 오밀조밀했고, 싱크대의 대리석 무늬는 누가 슈거파우더라도 집어던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해상도에 거울을 슬쩍 보았는데, 비치는 내 얼굴에 잡티가 가득했다. 안 본 눈 삽니다. 그런 농담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올랐다. 알레르기가 가라앉은 동생은 천천히 주방으로 나왔다. 야키소바를 구우며 온 집안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무슨 실명되었다가 돌아온 사람 같다며 놀렸다. 나는 그런 동생의 눈 위에 자라난 눈썹을 한올한올 세어보았다. 신기하긴 참 신기하다. 당장 미래에서 구글 글래스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이만큼의 놀라움을 가져다주진 못할 것이다. 괜히 수백 년간 팔린 물건이 아니다.

 

 

 안경과의 첫 협업은 신기하고 슬펐지만, 풀-에이치디로 볼 고속버스 바깥 풍경만은 기대가 되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나무와 산과 집과 마을이 온전히 분리되어 개별 객체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구로 돌아오는 날 아침, 나는 손을 깨끗히 씻고 안경과 같이 구매한 콘텍트렌즈를 착용했다. (두 번째로 보는 고화질 가정집은 덜 충격적이었다.) 오후 두 시 반, 집을 나선 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지 않고 버스 노선표를 읽어냈으며, 흔들리는 버스 벽에 붙은 130번 노선을 속으로 줄줄 읊었다. 창 밖에 보이는 사람들과 개는 제각각 다르게 생겨서 제각각 다른 옷을 입고 제각각 다른 주름을 만들어냈다. 아파트는 조금 더러웠지만 섬세하게 만든 레고 블록 작품처럼 반듯했다. 분명 나도 이정도의 시력을 가졌던 적이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까마득히 먼 날의 이야기인지.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대하던 고속도로의 풍경은 가정집보다 훨씬 더, 시내보다 더 아름다웠다. 거대 브로콜리 같은 산과 철사공예품 같은 앙상한 겨울 나무들. 흙으로 빚어낸 구름 같은 밭들. 유심히 보아왔던 차창 밖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썩은 이파리가 사실은 사람들이 널어놓은 넝마들이었다는 것을, 하천의 물결은 온갖 새들로 인해 복잡하게 요동친다는 것을, 노인들의 농사가 예상보다 더 다이내믹하다는 사실을 빠르게 계속 깨달아갔다.

 

 

 자취방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여섯 시 반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자마자 바닥의 지저분함에 기겁하고 청소기를 꺼내 곳곳을 쓸었다. 이전까지 여기가 이렇게 더러웠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하루종일 식사도 못한 배고픔을 잊고서.

 

 

 

 여태껏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유심히 째려보고, 중요한 것은 카메라로 찍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간단히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세상의 모든 문이 한꺼번에 열린 것 같다. 항상 문을 일일이 잡아 열어봤던 나는, 이제 원하는 문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손잡이로 몸을 데려가지 않아도, 팔을 뻗어서 손잡이를 잡을 수 있다. 21세기의 화려한 디스플레이들에게 시력을 빼앗긴 많은 이들에게는 뻔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이 신기함을 말하고 싶어 몇자 적어보았다.

 

 

요약: 대만족

'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주만 비건식  (0) 2024.08.19
일주일 일본 여행  (0) 2024.01.22
오늘의 수술  (0) 2024.01.06
디지털 카메라 사진 백업  (0) 2024.01.03
집이 생겼어요.  (0) 2023.12.26